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K. 포크 (문단 편집) == 생애 ==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테네시]] 주에서 성장하였다. 졸업 후에는 내슈빌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되었고 1819년 테네시 주 상원의원을 시작으로 정치에 발을 들인다. 참고로 이 때 그의 룸메이트였던 윌리엄 모즐리는 플로리다의 첫번째 주지사가 되었다([[앤드루 잭슨]]이 첫번째이긴 한데 이쪽은 아직 [[플로리다]]가 준주 시절이었다). 그후 연방 하원의장을 거쳐 테네시 [[주지사]]가 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후 테네시 주지사 선거에서 2번 연속으로(1838, 1842) 낙선해버린다. 이러한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은 의외의 결과였고, 포크는 처음에는 [[미국 부통령|부통령]] 후보를 희망하였다. 이것은 [[앤드류 잭슨]]의 지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포크는 잭슨을 열렬히 지지하고 자신의 스승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 [[파일:external/hpcanpub.mcmaster.ca/CP00110-3.jpg|width=300]] || || 54도 40분이 아니면 전쟁이다! || 당시 선거에서 그의 상대는 [[헨리 클레이]]. 자신보다 훨씬 오랜 정치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이미 2번이나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거물이었다. 이러한 그를 상대로 그는 당시 대세를 타고 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론에 따라 적극적이고(+강경한) 영토 확장을 추구했으며 포크 본인도 명백한 운명론의 신봉자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영토를 알래스카까지 북진시키겠다는 것(54° 40' or Fight). 어쨌든 이러한 내용이 먹힌건지 어렵사리 대통령에 당선된다. 불과 3만표 남짓의 차이였다. 대통령으로서 가장 주목받는 업적은 영토 확장이다. 우선 당시 말이 많던 [[텍사스 공화국]]을 합병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멕시코와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으나, 포크로서도 텍사스에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공공연히 태평양까지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포크는 [[재커리 테일러]] 장군에게 몰래 명령을 내려 국경 쪽에서 집적거리며 충돌을 야기시키게끔 한다. 결국 [[미국-멕시코 전쟁]]이 터졌고, 결과는 미국의 승리. 이로 인해 헐값에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정적]]들은 그를 까기에 바빴는데, 우선 [[휘그당]]에서는 대부분 '''"비도덕적인 전쟁이다!"'''라며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고 북부에서는 '''"얻은 땅이 거의 다 남쪽에 있으니 미주리 타협에 의해 다 노예주 되는 거 아냐?"'''라고 까고 있었다. 이 때 받은 스트레스가 그의 이른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1848년의 중간선거에서 휘그당이 동부의 반전정서를 받아 대거 당선되면서 여소야대의 하원이 등장했다.[* 정작 휘그당은 1850년 정권을 인수하던 선거에서는 하원 다수당을 잃는다.] 이때 첫 등원을 한 인물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어찌됐건 간에 그는 이미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했던 상태였기에 1849년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다.[* 포크 이후 재선에 도전하지 않은 대통령은 러더퍼드 헤이스와 체스터 아서가 있다.] 그렇지만 퇴임 후 불과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인은 [[콜레라]]. 임기 말부터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퇴임한 포크는 민주당 지도부의 요청을 받아 남부 지역을 순회여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남부에서 인기가 많았던 포크의 인기를 이용해 민주당의 지지도를 높이려는 전략이었다. 포크는 그대로 했고 순회여행도 민주당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는데 이 와중에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쓰러졌다. 그래서 여행을 취소하고 테네시 주의 별장으로 돌아왔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